『왕자가 사랑한 여신공주』감상, 그리고 성인물 작가의 라이트노벨 진출에 대해서 by 크로이츠



이 나라에는 속설이 있다.
「여왕이 제위에 오르면 나라가 번영한다」
그건 탁월한 통치를 행한 과거의 여왕들과, 전설인지 실재의 인물인지조차 분명치 않은 여신 데스데롯사를 기리는 마음에서 비롯된 속설일지도 모른다.
현재 제위에 올라있는 건 남성인 왕. 그 선대도 역시 왕이었다. 레티시아 공주는 왕의 외동딸. 미래의 여왕이 치르는 입왕녀(立王女)의 예식은 실로 반세기 만의 경사인 것이다. 라스파이유 왕가의 공주는 인간이 아니다. 여신의 후예인 공주님과, 빵집의 딸인 자신이 닮아도 되는 건지 하는 생각도 든다.


티아라문고의 『왕자가 사랑한 여신공주─장미와 음모의 무도회』를 읽었습니다. 예전에도 몇 번 언급한 적 있는 와카츠키 히카루 씨의 여성향 레이블 데뷔작인데다가 일러스트도 제가 예전부터 좋아했던 하야세 아키라 씨이기 때문에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작품입니다.

왕위계승자인 레티시아 공주와 똑같이 생긴 빵집의 딸 마리에가 엉겁결에 왕궁의 가면무도회에 참가하게 되면서 시작되는 판타지물입니다만, 상당히 재밌게 읽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최근 읽은 소설 중 이렇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근거리면서 읽은 소설은 없었던 것 같네요.
무엇보다 전개가 엄청나게 빠릅니다(!) 한국 로맨스소설이라면 3권쯤 이어졌을 듯한 내용을 1권 분량으로 후다닥 해치워버리고 있는데, 로맨스물이라기보다는 궁정음모물(?)에 가까운 내용인데다가 판타지적 요소도 잔뜩 들어가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예측할 수 없는 전개가 계속되더군요. 설마 {초반에서 귀족청년과 로맨틱한 하룻밤을 보냈던 빵집 딸이 몇십 페이지 뒤에서는 자신을 강간하려 했던 남자의 목을 크리스탈 소드로 베어버리고 광소를 터뜨릴 줄이야...} 처음에는 그냥 「왕자와 거지」스타일의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만 이야기가 계속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밀도 있게 진행되어서 정말로 재미있게 읽었네요.
...사실 글솜씨가 뛰어나서 재밌는 건 아닌 것 같고, 이런 스타일의 소설을 쓰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게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지금까지 냈던 일반 라이트노벨도 전부 러브코메였으니) 소설로서의 완성도 자체는 낮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거기다가 여성향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캐릭터의 매력, 아니 존재감 자체가 형편없을 정도로 약하더군요. 여자캐릭터들은 주체적으로 생기 있게 움직이는 데 비해 남자들은 정말 있으나마나 할 정도로(아마 악역을 제외한 남자캐릭터들은 전부 빼버려도 이야기가 성립될 듯) 존재감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남주 따윈 그냥 침대위에서 일하는 기계일 뿐이지...라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에로신에 대해서도 여성독자들의 불평이 많은 것 같던데, 확실히 제가 봐도 ‘에로신에 정서가 없다’라는 감상에 일리가 있는 듯. 남성향 에로물의 에로묘사에서 단어만 소프트하게 바꿨을 뿐인 것 같더군요. 솔직히 여주는 멋있는데 남주가 매력이 없어서 에로신이 별로 기쁘지 않은 것 같기도...
뭐 저로서는 와카츠키 히카루 소설 중에서는 가장 취향에 맞는 작품이었기 때문에(다른 작품은 그냥 라이트한 남성향 러브코메뿐이라) 이 노선으로 계속 작품활동을 해줬으면 좋겠네요. ...후기에서 자기소개를 너무 열심히 하는 게 좀 신경쓰입니다만(이 분도 쌓인 게 많아서 그런지 자기주장이 강한 분이라...). 그냥 ‘여성향 소설은 처음 써봤어요>_<’ 정도만 얘기해도 될 텐데 말이죠.


그러고보면 요새는 쥬브나일포르노 작가들의 이름을 다른 업계에서 보게 되는 일이 무척 많아진 것 같습니다. 티아라문고에 와카츠키 히카루 씨를 비롯한 여류 쥬브나일포르노 작가들이 참가하는 거야 티아라문고가 미소녀문고(*대표적인 쥬브나일포르노 레이블)의 자매격인 브랜드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요즘은 일반 라이트노벨에서도 쥬브나일포르노 출신 작가들이 많이 작품을 내놓고 있더군요.
몇 년 전 와카츠키 히카루 씨가 HJ문고에 진출하면서 화제가 되었던 걸 생각하면 참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이것도 와카츠키 히카루 씨가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라이트노벨에 도전해 성과를 낸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참고포스팅) 특히 이치진샤문고 등 신진 레이블에서는 적당한 러브코메물을 쓸 수 있는 즉전력 작가로서 쥬브나일포르노 작가들을 자주 활용하게 된 것 같더군요.
쥬브나일포르노라는 장르는 ‘서사’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형화된 세계입니다만, 일반적인 관능소설과는 달리 기반으로 하는 문화가 라이트노벨하고 같기 때문에 라이트노벨에서도 어느 정도 통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쥬브나일포르노는 한정된 지면에서 캐릭터의 매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전달해야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모에 미소녀캐릭터의 표현기술이라는 측면에서는 웬만한 라이트노벨 작가 이상의 것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는 것 같더군요(...라고 최근 실제로 책을 여러권 씩 살펴보면서 느꼈습니다).
요 몇 년 사이 에로게 시나리오라이터의 라이트노벨 데뷔도 늘어나고 있습니다만, 그쪽은 문장이 소설답지 못하다거나 구성면에서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종종 받기 때문에... 일단 ‘1권 분량’에 맞춰서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에 익숙하면서 ‘소설가’인 쥬브나일포르노 작가들이 많이 활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치진샤문고의 11월 신간인 하바라 테츠(葉原鉄)의 『흙속성을 얕보지 마라!(土属性はダテじゃない!)』는 꽤 기대중입니다. 사실 요새 『디플래그!(ディーふらぐ!)』를 읽은 뒤 속성을 지닌 캐릭터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는 별로 상관없는 얘기군요(...).

덧글

  • 위노 2009/10/24 00:47 # 답글

    저런 충격적인 전개가 숨어있다니...
  • 크로이츠 2009/10/24 00:57 #

    히로인의 심리변화가 빠르더군요.
  • rumic71 2009/10/24 00:52 # 답글

    확실히 와카쓰키 히카루는 문장력이 좀...(이러면서 세 편이나 샀지만)
  • 크로이츠 2009/10/24 00:57 #

    유사장르의 다른 작가와 비교했을 때 특별히 문장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유의 버릇(?)은 있는 것 같습니다만...
  • 이네스 2009/10/24 01:06 # 답글

    형언하기 힘듯 멋진전개군요. 광소라니.

    저정도로 초고속 전개인작품은 잘 없는데. ㅡㅡa
  • 크로이츠 2009/10/24 01:13 #

    하지만 저건 서장에 불과했습니다...
  • 돈까밀로 2009/10/24 01:11 # 삭제 답글

    쥬브나일포르노 계열은 '정형화'라는 단어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정말 철저하게 붕어빵을 양산해내죠. 특히 2차원드림.. 그런데도 그럭저럭 읽을만하고 또 판매량도 그럭저럭 되는걸보면, 어쩌면 쥬브나일포르노가 만들어낸 그 정형성은 어떤의미로는 아무 군더더기도 남지않은 완벽한 하나의 '완성형'이 아닐까 하는 황당한 생각을 가끔 하곤 합니다.
  • 크로이츠 2009/10/24 01:17 #

    와카츠키씨가 블로그에서 언급한 것입니다만, 쥬브나일포르노에서 가장 중요한 건 레이블의 색깔을 통일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그렇기 때문에 통일성을 갖추지 못했던 레이블들은 전부 망하고, 미소녀문고와 2차원드림노벨즈, 2차원드림문고만 살아남은듯).
    약속과 형식을 준수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만화나 라이트노벨과는 달리 큰 히트작도 없지만 큰 실패작도 없다고 합니다.
  • 원생군 2009/10/24 01:40 # 답글

    상당한 포스가 느껴지네요..., 전개속도의 변화만으로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니
  • 크로이츠 2009/10/26 19:46 #

    롤러코스터죠...
  • Niveus 2009/10/24 09:23 # 답글

    흐음 좋은데요.
    개인적으로는 남캐따위 어찌되도 상관없기때문에(...야!?)
  • 크로이츠 2009/10/26 19:47 #

    저는 남캐가 더 중요해서-_-;
  • 사화린 2009/10/24 23:44 # 답글

    오옷, 가려진 부분도 과감히 긁어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관심이 무진장무진장 많이 증폭했습니다 >_<

    아아.. 얼른 공부 열심히 해서 읽어봐야겠네요.. 으헝 ;ㅁ;
  • 크로이츠 2009/10/26 19:47 #

    꽤 읽을만 했습니다(...)
    이런건 국내에 들어올 가능성이 낮으니 원서로 읽어야겠죠;
  • kurame 2009/10/26 11:25 # 답글

    흙속성은 대체 뭔가요? 이런저런 엄한 상상이 떠오를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냥 말하지 말하주세요.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으니까! (...)
    쥬브나일포르노쪽은 아는게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견문을 넓히게 되네요.
  • 크로이츠 2009/10/26 19:48 #

    그 즐거움을 깨부수는 이매진브레이커!
    ...그냥 물속성 불속성 바람속성 그런 의미의 속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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