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gloos | Log-in  

『9월병』




...하느님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해도,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하느님이라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차가운 그의 손끝이 나의 목을 조르는 그 날이 찾아올 때까지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꿈 속 깊은 곳의 남쪽 섬을 향하는 것이다.




주말부터 시기사와 카야의 만화 『9월병』을 읽어서 어질어질하다.

『9월병』은 원래 시기사와 카야가 3년 가까이 동인지로 발표하고 있었던 만화인데, 동인행사에서 하쿠센샤 편집자에게 체크당해 이렇게 상업출판되게 되었다.
주인공은 지방에서 근무하는 은행원인 이사카 히로시와 그의 여동생 이사카 마츠루. 약혼녀가 결혼식 직전에 옛남자와 함께 도망쳐버린 날, 히로시는 예전부터 그를 사랑해온 여동생과 육체관계를 갖게 되고 그 뒤로도 여동생의 요망에 따라 계속 관계를 지속한다. 아버지는 예전에 집을 떠났고 어머니도 병으로 세상을 떠난 상태에서 아무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삶을 단 둘이서 함께 살아온 히로시와 마츠루였지만, 히로시가 본점으로 전근가게 되면서 회사동료인 에비사와 미도리와 가까워지고 몰래 원조교제를 하고 있었던 마츠루가 가출하는 등의 일이 벌어지면서 조금씩 변화가 생기게 된다...라는 스토리.

시기사와 카야는 육체관계를 포함하는 남녀관계의 깊은 부분을 섬세한 그림체와 감성으로 묘사하는 작가로, 기존 작가와 비교하자면 니노미야 히카루와 비슷한 작풍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시기사와를 발굴한 편집자는 원래 니노미야 히카루의 담당자였다는 소문).
하지만 인간 심리의 세밀한 부분을 교묘하게 포착해, 독자의 허를 찌르면서 한없이 섬세하고 안타깝게 묘사하는 이 표현력은 어느 작가의 어느 작품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특히 『9월병』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두 사람과 그 주변인물들을 중심으로 어두우면서 센티멘탈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 끊임없이 계속되는 심리적 공격이 괴로울 정도였다. 빈번하게 나오는 섹스 묘사도 항상 서로가 서로의, 혹은 자기 자신의 손목을 칼로 긋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특유의 섬세한 선에서 나오는 에로틱함보다는 안타까움이 먼저 느껴졌다.


『9월병』을 비롯한 시기사와 카야의 작품에서 묘사되는 감정들이란 쉽게 말해서 ‘어쩔 도리가 없는’ 것들이다. 어떤 갈등 요소가 있어서 그걸 해결하면 되는 것도 아니고, 솔직해져서 자기의 마음을 고백하면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소중히 여기면 여길수록 상대방을, 자신을 상처 입힐 수밖에 없는 상황. 이 세상 어디에도 해결할 방법이 없는 감정을 안은 채 헤매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읽고 있는 나 자신도 같은 곳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솔직히 마츠루는 종반부를 제외하고는 감정이입하기 어려웠지만(사실 이렇게 독특한 정신세계를 지닌 후시기짱은 예전부터 공감하기 어려웠음...), 히로시와 에비사와에게는 잔뜩 감정이입하면서 그들이 놓인 세계를 깊게 향유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잃고 약혼자를 잃고 여동생과 관계를 가져버린 히로시가 한없이 내벌적(內罰的)인 사고방식을 고수하며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모습을 에비사와의 시점에서 바라보았고, 구원을 바라고 있는 히로시처럼 에비사와를 바라볼 수도 있었다. ...사실 히로시는 성실한 안경미남회사원이고 에비사와는 무척 좋은 여자여서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음음.



...그럼 이제 『“문학소녀”와 통곡의 순례자』나 읽을까.
뭔가 엄청나게 매저키스트가 된 느낌이다.

by 크로이츠 | 2007/09/10 22:06 | (과거로그)雜說 | 트랙백 | 덧글(7)

Commented by 레아라 at 2007/09/10 23:42
뭔가 작품이라 부를 만한 것인가 보네요... 꼭 한번쯤 읽어보고 싶네요...
Commented by DSmk2 at 2007/09/11 00:32
이런 작품 정말 좋아합니다. 읽으면서 '난 지금 왜 자해행위를 하고 있는걸까?'라는 느낌이 들정도로 쑤셔주는 그런거요.
Commented by アネゴ at 2007/09/11 09:21
무진장 구미가 당기는데요...
Commented by 파실 at 2007/09/11 18:29
읽으면 가슴이 아파질 것 같군요.
Commented by Gior키리코 at 2007/09/12 01:18
니노미야 히카루가 언급되다니 저도 확 떙기는군요.
Commented by 제목없음 at 2007/09/12 14:52
작화가 매우 마음에 드는군요. 나중에 돈 생기면 구해봐야할까 싶습니다
...그나저나 그럼 영화감독 김 모 감독님의 작품처럼 아프기 위해 보는 작품인 겁니까orz
Commented by nemo at 2007/11/12 20:23
[箱舟の行方]

이것 밖에 못 봤습니다
(어서 빨리 누군가 라이센스판을 내줘)

※ 이 포스트는 더 이상 덧글을 남길 수 없습니다.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