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07월 29일
[Key 크로스오버 2차창작] 행복의 메커니즘 (둘째날)
둘째날
다음날, 아키오와 유키토는 공원에 있었다.
“승부다, 쿠니사키 유키토.”
“……왜 내가 야구를 해야 하는 건데.”
아키오에게서 건네주는 배트를 손에 쥔 채, 유키토에게 불만스럽게 외쳤다.
“시끄러. 밥도 먹여주고 잠도 재워줬으면, 잔말 말고 이 몸의 노예가 되라고.”
“내 몸값이 되게 싼 것 같은데, 어이.”
투덜거리면서도, 유키토는 배트를 잡고 자세를 잡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키오의 눈에, 무언가 불타는 것이 깃들기 시작했다.
“……좋은 자세군.”
아키오는 자세를 취했다.
“좋아, 90도 각도의 나의 커브를 받아봐라!”
“메이저리그에나 가!”
유키토가 절규하면서 배트를 휘둘렀지만,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좋아, 타자의 다리뼈를 박살낼 수 있는 나의 싱커를 받아봐라!”
“박살내지 마!”
또 헛스윙.
“좋아, 중간에 사라지는 나의 필살마구를 받아봐라!
“TV에나 출연해!”
또다시 헛스윙.
배트를 휘두르는 것보다는 소리치는 데 더 체력을 소모한 것처럼 보이는 유키토는, 배트를 땅에 떨어뜨리고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아키오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었다.
“뭐냐, 벌써 끝인가.”
어느새 주변에는, 어린애들이 모여 있었다. 평소에 아키오가 자주 놀아주는, 아니 어쩌면 아키오와 놀아주는 어린애들이었다.
“역시 앗키는 최고야.”
“그러고 보니 저 사람, 어제 여기서 구걸하고 있던 사람 아냐?”
“아…… 거지였구나. 빵 훔치다가 걸려서 아키오와 승부하고 있는 거 아닐까?”
“아…… 이기면 눈감아주고, 지면 노예?”
“야해.”
“어째서냐!”
그렇게 외치며, 유키토는 다시 일어섰다.
숨을 몰아쉬면서 유키토는 배트를 높게 치켜들었다. 홈런사인이었다.
“한 번, 한 번만 더 던져봐라. 멋지게 홈런을 날려서, 이 주변의 아이들에게 쿠니사키 최고전설을 심어주겠다.”
그 말을 듣고, 아키오가 코웃음을 쳤다.
“쳐볼 테면 쳐보라지. 좋아, 나의 지구를 관통하는 파워볼을 받아봐라!”
이번에 유키토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공을, 1초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눈으로 쫓았다.
무거운 배트를, 단번에 휘둘렀다.
깡.
“이얏호!! 쿠니사키 최고!!!”
멋지게 아키오의 직구를 쳐낸 유키토는, 오른손을 높게 치켜들며 환호했다.
날아가는 공을, 아키오가 얼빠진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봤나, 아키오! 이 몸의 풀스윙이면, 당신 볼 따위는 대기권까지 날려보낼 수 있다고!”
그렇게 유키토가 의기양양해 있을 때, 쨍그랑 소리가 들렸다.
“아.”
“아.”
두 남자는, 동시에 얼빠진 소리를 냈다.
“네가 친 거니까, 네가 알아서 책임져라.”
“잠깐! 야구하자고 한 건 당신이잖아!”
“이 자식, 네가 혼자서 공 던지고 혼자서 공 친 거니, 네가 알아서 해!”
“그런 게 가능하냐! 좋아, 집주인한테 빵집 주인이 180도 커브를 시도하다가 깼다고 말해줄 거다!”
“뭣이! 이 자식 네가 던진 공의 책임을 나한테 지울 셈이냐!”
“그러니까 던진 건 당신이잖아!!!”
두 남자는 서로의 멱살을 잡고,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두 바보였다.
◇◇◇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나에와 미나기는 후루카와 빵집을 지키고 있었다.
사나에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키오씨와 쿠니사키씨, 사이가 좋은 것 같네요.”
“……네.”
미나기는 그렇게 대답하며, 쟁반에 빵을 담아온 손님에게 영수증을 건네주고 있었다.
“토오노씨는, 일을 배우는 게 빠르네요.”
오늘 아침부터 후루카와 빵집의 일을 돕고 있던 미나기는, 이미 계산까지 완벽하게 해내고 있었다.
“……보통.”
“토오노씨, 미나기씨라 불러도 될까요?”
갑자기 사나에가 그렇게 묻자, 미나기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미나기가 대답하지 않자 사나에는 변함없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토오노씨라 부를게요.”
“……죄송합니다.”
미나기는 고개를 숙였다.
“……쿠니사키씨도…… 토오노라고 부르고 있고.”
“이름으로 불리는 건, 싫은가요?”
“……싫지는 않지만.”
미나기는 한층 더 고개를 숙였다. 성으로 부르게 했던 건, 과거 모친이 미나기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은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유키토와 여행하고 있는 지금, 그런 건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나기는 여전히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두려웠다.
“크아…… 엄청나게 혼나버렸다.”
그때, 아키오가 머리를 긁적이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즐겁게 노셨나요, 아키오씨.”
사나에가 웃는 얼굴로 남편을 맞이했다.
아키오에 이어 유키토도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즐겁게 노셨나요, 쿠니사키씨.”
“……다시는 안 해.”
투덜거리면서 유키토는 미나기를 바라보았다.
“어이, 토오노. 슬슬 나가자. 즐거운 인형극을 시작해야지.”
“아, 네.”
유키토의 말을 들은 미나기는 사나에에게서 빌렸던 팬더 마크의 앞치마를 벗기 시작했다.
벗은 앞치마를 사나에에게 건네주며, 미나기는 약간 부끄러워하면서 입을 열었다.
“……어제는 못했지만, 오늘은 저도 만담을 할게요. ……비장의 개그를, 생각해 두었습니다.”
미나기의 말에, 유키토의 얼굴이 굳어졌다.
분명히 곤란해 보이는 유키토의 얼굴을, 아키오와 사나에가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아, 아니, 토오노…… 만담은 하지 않아도 돼.”
유키토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렇게 말했다.
“……왜요?”
토오노의 물음에 유키토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는 그냥 넘어가 왔지만, 이번 기회에는 제대로 말해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유키토는 말했다.
“아니, 그게…… 실은 토오노의 만담은 별로…… 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말야, 손님을 끌어 모으는 데는 그다지……”
유키토의 표정을 보며, 미나기는 유키토의 진의를 깨달았다.
“……저의 만담은,”
미나기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쿠니사키 극단의 짐이었던 거군요오오오!”
그렇게 외치며, 미나기는 가게를 뛰쳐나갔다. 당황한 유키토가, 옆에 놓여있던 빵을 입에 물며 외쳤다.
“나는 매우 좋아한다아아아아앗!”
미나기를 쫓아 달려가는 유키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키오는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녀석, 아무 생각 없이 빵을 입에 물고 가버렸군…….”
“분명, 제 빵이 마음에 들었던 걸 거예요. 저 빵, 내일부터는 더 많이 만들까요?”
“사나에, 사랑한다.”
“고마워요.”
◇◇◇
결국 유키토는 미나기를 붙잡는데 성공, 겨우 달래는 데 성공했다. 미나기가 너무 멀리까지 달려갔기 때문에, 후루카와 빵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결국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인형극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다른 도구는 후루카와 부부의 집에 두고 왔지만, 인형은 갖고 왔기 때문에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인형을 바닥에 내려놓고, 유키토는 정신을 집중했다. 바닥에 누워있던 인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모의 손을 잡고 옆을 지나가던 어린아이가, 그 모습을 보고 흥미를 가진 듯 이쪽으로 걸어왔다.
유키토는 아이가 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것을 확인한 뒤, 저연령을 대상으로 한 스토리로 인형극을 하기로 결정했다. 미나기가 생각해낸, ‘아기 곰의 벌꿀 찾기’라는 스토리였다.
아까는 그렇게 말했지만, 실은 같이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미나기가 생각해주고 있는 인형극의 ‘스토리’쪽은 상당히 훌륭해서, 손님을 끌어 모으는 데에 상당히 도움이 되고 있었다.
미나기가 나레이션을 담당하고, 유키토가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아기 곰을 연기한다. 잠에서 깨어난 아기 곰이 벌꿀을 찾아 돌아다니는 이야기에,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부모들도, 아버지 쪽은 피식피식 웃으며, 어머니 쪽은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인형극을 보아주고 있었다.
마침내 아기 곰이 벌꿀을 맛있게 먹고 다시 잠이 들었을 때, 세 명의 관람객들은 모두 웃으면서 박수를 쳐주었다. 유키토와 미나기는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하고, 인형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무척, 재밌는 인형극이네요!”
상당히 젊어 보이는, 작은 키의 어머니가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특히, 실 같은 것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는데 움직이는 게 대단해요! 뭔가 장치가 안에 있는 건가요?”
질문을 받고, 유키토는 고개를 저었다.
“장치나 속임수 같은 건 없어. 이건, 법술로 움직이고 있는 거니까.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 인형이 움직이는 거지.”
보통 이런 어른들에게 법술 얘기를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거나 그냥 웃어넘겨지곤 하지만, 이 사람은 달랐다.
“법술이요? 대단해요!”
정말로 놀라워하는 그녀를, 남편으로 보이는 큰 키의 남자가 쿡쿡 찔렀다.
“나기사, 이제 슬슬……”
“아.”
나기사라 불린 여성은, 지갑을 열어 500엔짜리 동전을 꺼냈다.
“죄송해요, 이번 달 생활비가 빠듯해서 이것 밖에……”
“……나기사?”
“네?”
갑작스럽게 이름을 불린 그녀는, 놀라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인형사를 바라보았다.
약간 무서운 눈의 그 인형사는,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인물이었다.
◇◇◇
나기사가 가족들을 물론 유키토와 미나기까지 함께 데리고 오자, 사나에는 정말로 기뻐하며 다섯 사람을 맞았다. 평소에는 많아봤자 두 사람밖에 없었던 가게에 갑자기 일곱 명이 서있게 되었기 때문에, 가게는 상당히 비좁은 상태가 되었다. 거기다가 그 중 세 사람은 평균 이상으로 건장한 남자들이었기 때문에, 결국 사나에의 판단으로 후루카와 부부만 남고 손님들은 모두 방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유키토와 미나기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기사와 그 남편인 오카자키 토모야와 마주 앉았다. 나기사가 내온 차를 홀짝이며, 유키토는 아까 전부터 자신의 인형을 갖고 놀고 있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우시오라는 이름의 그 여자아이는, 인형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 망가뜨릴 것 같으면, 울든 말든 무조건 뺏는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유키토는 차를 홀짝거렸다.
옆에서, 미나기가 나기사에게서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것은, 환상세계의 이야기였다.
한 명의 외톨이 소녀와, 고철인형의 이야기였다. 괴롭고 외로운, 그 겨울의 환상세계 속에서, 소녀와 고철인형은 따뜻하고 사람들이 많은 곳을 향해 여행을 떠났다.
중간 중간에 나기사의 얘기가 끊기면, 토모야가 이어서 얘기했다.
이야기가 후반에 들어서자, 나기사는 잘 모르는 듯 토모야만이 얘기했다.
마지막에 소녀와 고철인형은, 결국 눈 속에서 쓰러지고 만다.
그때 소녀는, 자신이 원래 환상세계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녀는 환상세계 자체와 동화되어 있어서, 곧 원래 세계로 돌아갈 고철인형과 함께 갈 수는 없었다. 그녀가 이 세계에서 없어지면, 원래 세계의 빛들, 즉 사람들이 불행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소녀는 고철인형이 옆에 있어줘서 지금까지 외롭지 않았다. 소녀를 남겨둔 채, 고철인형은 원래 세계로, 모든 것이 일어나기 이전의 세계로 가게 된다. 소녀의 손을 잡으려하는 고철인형에게, 소녀는 외친다.
……안녕…… ……아빠……
……라고.
나기사도 토모야도, 이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혹은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공유하는, 출처가 불분명한 이야기. 무엇을 의미하지도 알 수 없는, 이상한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끝나자, 미나기가 입을 열었다.
“……이치노세, 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나기사와 토모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치노세 코타로, 이치노세 미즈에 부부와, 그 딸인 이치노세 코토미 박사. 이치노세 부부는 사고로 사망했지만, 훌륭한 과학자였다고 합니다. 현재, 그 연구를 딸인 이치노세 코토미 박사가 대를 이어서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치노세 코토미……”
토모야가 어디선가 들은 이름인 것 같은데…… 하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미나기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이치노세 부부가 연구하고 있던 건, ‘다른 세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세계?”
“네. 관측할 수 있는 세계 외에도 우주는 존재한다는 가정 아래, 숨겨진 세계의 존재를 처음으로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 이치노세 부부였다고 합니다. 이 세상이 그 모습을 갖추는 과정에서 떨어져나간 파편, 그것들이 모여 있는 세계를, 이치노세 부부는 증명하기 직전……이었다고 하더군요.”
나기사와 토모야는, 알 듯 모를 듯 하다는 표정으로 미나기를 바라보았다.
유키토는 말없이, 인형을 계속 만지고 있는 우시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분은, 평행세계라는 걸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평행세계?”
“사람마다 정의는 다르고,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미나기는 잠시 말을 끊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가능성, 내지는 선택지가 존재합니다. 물론, 지금 여기 있는 두 분이 걸어온 길은 하나이지만, 도중에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다른 미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쪽 세계가 아닌 다른 곳에, 다른 선택을 했기에 다른 미래가 된, 그런 세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론이 있습니다.”
“하아……”
“지금의 세계와는 다른, 수많은 가능성, 수많은 평행세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 세계를 지각할 수 없는 이상, 이 세계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2차원을 지각할 수 있는 건 3차원, 3차원을 지각할 수 있는 건 4차원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한 단계 위의 차원에 존재하지 않으면, 자신과 같은 차원의, 즉 옆에 있는 평행세계를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점점 어려운 얘기가 계속되자, 나기사와 토모야는 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보며, 미나기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두 분이 친해지지 않는 세계도 있을 수 있고, 두 분이 결혼하지 않는 세계도 있을 수 있지만, 두 분이 그 세계를 직접 볼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이치노세 부부의 이론의 ‘숨겨진 세계’에서라면, 다른 세계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세계를 볼 수도, 혹은 다른 세계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겠죠.”
미나기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저는, 두 분의 이야기 속의 환상세계는, 그런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축의 변화나, 여러 가지로 변화되는 가능성에 대한 언급이, 그렇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군요.”
나기사는 이해하기 어려운 듯 이마에 손을 대고 있었지만, 토모야는 무언가 감이 잡히는 게 있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미나기는 미소를 지으며, 나기사와 토모야에게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두 분의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네?”
“두 분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미나기의 부탁에, 나기사와 토모야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
저녁식사를 마치고도,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길고 긴, 감동적인 이야기에, 중간에 미나기는 몇 번이고 눈물을 흘렸고, 유키토도 슬쩍 뒤돌아 앉아 휴지로 코를 풀곤 했다.
대단원이라고 할 수 있는, 나기사가 우시오를 무사히 낳는 장면에서는, 결국 미나기는 눈물을 흘리면서, 동시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없이 나기사의 손을 꼭 잡았다.
고난을 함께 극복해온 두 사람의 기적 같은 해피엔딩에, 유키토도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기사와 토모야는, 그 날 하늘에서 빛이 눈송이처럼 내려왔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지만, 두 사람한테는 보였다고 했다. 마치 마을이 일으킨 기적이, 나기사의 생명을 구원한 것처럼.
“그래도 전,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기사는 우시오를 끌어안으며, 그렇게 말했다.
“이 마을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요. 마을 또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람들도 마을을 사랑하고 있어요.”
나기사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따뜻한 감정이 가득 찬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누구에게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 속에서 일어난 거니까, 기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당연한,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모두, 가족이니까.”
토모야가 덧붙였다.
나기사와 토모야의 모습을 바라보며, 유키토는 몇 달 전 북쪽의 마을에서 만난 소년을 떠올렸다.
눈이 그치기 시작한 마을의, 한 언덕에 그 소년은 서있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작은 소녀를, 양팔로 안아 들은 채.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니, 소년은 결혼식이라고 대답했다. 작은 소녀는, 그 품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소년은 유키토에게 말했다.
“이 녀석은, 봄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결혼식에 맞춰서 봄이 와서 다행이라고, 소년은 말했다.
하지만 유키토가 소녀를 바라보며 슬픈 눈을 하는 것을 깨닫고, 소년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기적을, 원하지는 않나.”
유키토의 말에 소년은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저는 수없이 많은 기적을 경험했어요.”
소년은 말했다.
“이 녀석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기적 아닐까요? 지금 이 녀석이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것부터가 기적이고, 마침 제가 이 마을에 돌아와 있었기 때문에 재회할 수 있었던 것도 기적이니까요.”
소년은 계속 웃고 있었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저는 수많은 기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어요. 나유키와 아키코씨하고도 재회할 수 있었고, 본래 만날 수 없었던 아유와도 만날 수 있었어요. 시오리는 자살을 포기했었고, 마이는 사유리씨와 만나있었어요. 그 외에도 수많은 기적들이, 제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눈을 감고, 품속의 소녀에게 볼을 비볐다.
“어째서 이 세상에는, 이렇게나 많은 기적들이 있는 걸까요. 지금 이 녀석과 이 자리에 서기까지도, 수많은 기적들이 있었어요. 생각해보면, 일상이란 수많은 기적들이 모여서 만들어져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적어도, 저는 이 기적들을 깨닫기 위해 이 마을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움직이지 않는 작은 신부를 안고, 소년은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눈물을 흘리지도 않고,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아마노하고도 약속했고 말이죠.”
소년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고, 소녀에게 웃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있었다.
그 소년의 모습이, 눈앞의 부부의 모습에 겹쳐 보였다.
‘당연한, 자연스러운 기적인가…….’
유키토는, 묘한 기분으로 나기사의 품속에서 잠들기 시작한 우시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키토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아마 토모야도 어느 정도는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환상세계의 이야기 속의 소녀는, 지금 잠들고 있는 우시오, 저 아이다.
아마 우시오를 낳은 뒤 나기사가 죽고, 후에 우시오 또한 죽는 ‘세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때의 우시오가, 그 환상세계 속의 ‘소녀’이다.
아키오와 나기사의 이야기를 종합해볼 때, 나기사는 어렸을 적에 자연, 혹은 마을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에 링크된 것이라 여겨졌다. 아마 그 곳은, 그 ‘환상세계’와 연결된 장소였을 것이다.
아키오는 죽어가는 나기사를, 현재 병원이 되어있는 공터에 데려갔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병원이 세워지면서 나기사는 점점 쇠약해졌다고 했다.
나기사는 어렸을 때 환상세계에서 생명을 받았던 게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환상세계의 기억을 가질 수 있었겠지…….’
유키토는 마음속에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환상세계와의 링크에 의지하고 있던 나기사의 생명은, 병원이 세워지면서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연이 파괴되고 인공물로 채워지면서, 환상세계와의 통로가 닫혀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 나기사가 죽고, 환상세계에서의 생명은 살아남은 우시오에게 연결되었지만…… 결국 우시오도 나기사와 비슷하게 고통을 겪고, 죽었던 거겠지. 하지만 환상세계에서 토모야와 만나, 토모야를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의 시간으로 돌려보내 빛을 모으게 했다…….’
그리고 각각의 세계의 토모야가 찾아낸 빛은 환상세계에 모여, 지금 세계의 나기사를 구했다.
유키토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어째서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술술 나오는지, 유키토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최근 들어, 자신이 지금의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연결되어있는 듯한 기분이 자꾸 들었다. 어쩌면 자신도 토모야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다른 세계의 자신과 연결되어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유키토는 생각했다.
머리가 아파졌기 때문에, 유키토는 복잡한 생각은 그만뒀다.
‘하지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기적이라고 해도 말야…….’
유키토는, 마음속에서 중얼거렸다.
’너희들은, 정말로 열심히 했어. 지금 세계의 너희들도, 다른 세계의 너희들도……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기적이 있는 거니까.’
유키토는 속으로, 나기사와 토모야에게 수고했다고 말했다. 누구의 일이든, 어디의 일이든 노력한 사람이 보답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유키토는, 가슴이 아리는 것을 느꼈다.
‘그럼, 그 환상세계의 소녀는 어떻게 된 걸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겨울의 세계에 홀로 남겨진 외톨이 소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혼자 추운 눈 속에 남기로 한 소녀가, 유키토는 안쓰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 소녀의 행복은? 그 소녀의 미래는?
그 소녀만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쓸쓸한 웃음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인가.
유키토는, 자신과 미나기가 공유하는 추억 속에 존재하는, 한 명의 소녀를 떠올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미나기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쓸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
오카자키 부부와의 얘기를 끝낸 뒤, 아키오의 주도로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제대로 술을 마실 수 있는 건 남자들뿐이었지만, 평소에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여자들도 이번에는 한두 잔 정도는 술을 입에 댔다. ……술주정이, 대단했지만.
술잔이 몇 번 돈 뒤 아키오의 주도로 에로토크가 시작되어, 미성년자에게는 들려주기 어려운 얘기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본래라면 사나에와 나기사가 말렸겠지만, 둘 다 취해있었기 때문에 이야기는 계속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참고로 가장 곤란해 했던 건, 토모야였다.
결국 유키토가 사나에와 나기사에게 동시에 추파를 보내는 것을 보고 격노한 아키오가 술병을 휘두르다가 미끄러져서 기절, 그대로 잠이 들어버리는 것으로, 광란의 연회는 겨우 막을 내렸다.
토모야는 해롱대는 나기사를 부축하며 미리 우시오를 재워놓은 나기사의 방으로 이동했고, 유키토와 미나기도 어제 묵었던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유키토는 조금 휘청거리는 미나기를 이불에 눕혔다. 취한 미나기는 약간 얼굴이 상기되어 있고 가끔 미소를 지어서, 무언가 요염한 부분이 있었다.
유키토는 불을 끄고 따로 깔려있던 이불 속에 누웠다.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유키토에게, 미나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쿠니사키…… 씨?”
“뭔데, 토오노.”
유키토가 대답하자, 잠시 후 미나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우시오, 귀여웠지요?”
“음…… 그랬지 뭐. 보통 어린애는 조금 짜증나는 경우가 많지만, 우시오는 말썽도 안 부리고 얌전해서 마음에 들었어.”
“……우리 아기도, 그렇게 귀여울까요?”
“풋!”
아마 무언가를 먹거나 마시고 있는 도중이었다면, 대참사가 일어났을 것이다. 유키토는 이불 속에서 벌떡 일어나 미나기 쪽을 바라보았다.
“토, 토오노? 서, 설마?”
“……아, 그런 얘기는 아니고.”
어둠 속에서, 미나기가 작게 웃는 것이 보인 듯 했다.
“……그냥, 생각해봤을 뿐…….”
“……깜짝 놀랐잖아…….”
유키토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뭐, 토오노를 닮았다면 귀엽…… 지 않을까?”
애매하게 대답하는 유키토.
“……아까 이름…… 을 생각해봤는데요.”
술자리에서 계속 조용하더니,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유키토는, 술을 마시며 미나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궁금해졌다.
“……여자아이라면, 미치루.”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던 대답이었다.
“……그리고, 남자아이라면……”
미나기는, 잠시 말을 끊었다.
“남자아이라면, 어떻게 할 건데?”
유키토의 물음에, 미나기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키토.”
“앙?”
“……유키토, 라고 할 거예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쿠니사키씨.”
유키토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다시 미나기가 말했다.
“……그쪽으로, 가도 될까요……?”
미나기가 일어나, 어둠 속에서 천천히 유키토에게 다가갔다.
미나기는 유키토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 유키토의 곁에 누웠다.
그리고 유키토의 팔을 껴안았다.
“……저는, 무서워요.”
미나기는 유키토에게 속삭였다.
“……쿠니사키씨가, 언젠가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저는 언제나 무서워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모른 채, 유키토는 미나기의 목소리를 들었다.
“언젠가 제가 모르는 곳에서, 모든 힘을 다 쓰고 없어져 버릴 것 같아서, 그게 무서워서……!”
미나기는 작은 목소리로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함께 여행을 하면서 눈물을 흘린 적은 있었지만, 우는 목소리를 낸 건 처음이었다. 아마, 3년 전 그 비가 내렸던 옥상 이후의 일.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절 내버려두고 사라질 것 같아서, 외톨이로 남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래서……”
이불 속에서 유키토가 몸을 움직이자, 미나기는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옆으로 누운 유키토가 미나기의 어깨를 안아주자, 얌전히 몸을 맡겼다.
“토오노.”
“……네.”
“이 마을에, 남지 않을래.”
유키토의 말에, 미나기는 곧바로 대답했다.
“싫어요.”
“……그런가.”
“저는 분명히, 데려가 달라고 말했어요. 용기도 의지도 없는 제가, 겨우겨우 말해서 선택했던 거니까…… 쿠니사키씨가 말하라고 했으니까, 제 입으로 말하면 데려가준다고 했으니까……”
미나기는 유키토의 품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계속 책임져주세요.”
유키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나기는 유키토의 품속에서, 조용히 울었다.
다음날, 아키오와 유키토는 공원에 있었다.
“승부다, 쿠니사키 유키토.”
“……왜 내가 야구를 해야 하는 건데.”
아키오에게서 건네주는 배트를 손에 쥔 채, 유키토에게 불만스럽게 외쳤다.
“시끄러. 밥도 먹여주고 잠도 재워줬으면, 잔말 말고 이 몸의 노예가 되라고.”
“내 몸값이 되게 싼 것 같은데, 어이.”
투덜거리면서도, 유키토는 배트를 잡고 자세를 잡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키오의 눈에, 무언가 불타는 것이 깃들기 시작했다.
“……좋은 자세군.”
아키오는 자세를 취했다.
“좋아, 90도 각도의 나의 커브를 받아봐라!”
“메이저리그에나 가!”
유키토가 절규하면서 배트를 휘둘렀지만,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좋아, 타자의 다리뼈를 박살낼 수 있는 나의 싱커를 받아봐라!”
“박살내지 마!”
또 헛스윙.
“좋아, 중간에 사라지는 나의 필살마구를 받아봐라!
“TV에나 출연해!”
또다시 헛스윙.
배트를 휘두르는 것보다는 소리치는 데 더 체력을 소모한 것처럼 보이는 유키토는, 배트를 땅에 떨어뜨리고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아키오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었다.
“뭐냐, 벌써 끝인가.”
어느새 주변에는, 어린애들이 모여 있었다. 평소에 아키오가 자주 놀아주는, 아니 어쩌면 아키오와 놀아주는 어린애들이었다.
“역시 앗키는 최고야.”
“그러고 보니 저 사람, 어제 여기서 구걸하고 있던 사람 아냐?”
“아…… 거지였구나. 빵 훔치다가 걸려서 아키오와 승부하고 있는 거 아닐까?”
“아…… 이기면 눈감아주고, 지면 노예?”
“야해.”
“어째서냐!”
그렇게 외치며, 유키토는 다시 일어섰다.
숨을 몰아쉬면서 유키토는 배트를 높게 치켜들었다. 홈런사인이었다.
“한 번, 한 번만 더 던져봐라. 멋지게 홈런을 날려서, 이 주변의 아이들에게 쿠니사키 최고전설을 심어주겠다.”
그 말을 듣고, 아키오가 코웃음을 쳤다.
“쳐볼 테면 쳐보라지. 좋아, 나의 지구를 관통하는 파워볼을 받아봐라!”
이번에 유키토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공을, 1초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눈으로 쫓았다.
무거운 배트를, 단번에 휘둘렀다.
깡.
“이얏호!! 쿠니사키 최고!!!”
멋지게 아키오의 직구를 쳐낸 유키토는, 오른손을 높게 치켜들며 환호했다.
날아가는 공을, 아키오가 얼빠진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봤나, 아키오! 이 몸의 풀스윙이면, 당신 볼 따위는 대기권까지 날려보낼 수 있다고!”
그렇게 유키토가 의기양양해 있을 때, 쨍그랑 소리가 들렸다.
“아.”
“아.”
두 남자는, 동시에 얼빠진 소리를 냈다.
“네가 친 거니까, 네가 알아서 책임져라.”
“잠깐! 야구하자고 한 건 당신이잖아!”
“이 자식, 네가 혼자서 공 던지고 혼자서 공 친 거니, 네가 알아서 해!”
“그런 게 가능하냐! 좋아, 집주인한테 빵집 주인이 180도 커브를 시도하다가 깼다고 말해줄 거다!”
“뭣이! 이 자식 네가 던진 공의 책임을 나한테 지울 셈이냐!”
“그러니까 던진 건 당신이잖아!!!”
두 남자는 서로의 멱살을 잡고,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두 바보였다.
◇◇◇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나에와 미나기는 후루카와 빵집을 지키고 있었다.
사나에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키오씨와 쿠니사키씨, 사이가 좋은 것 같네요.”
“……네.”
미나기는 그렇게 대답하며, 쟁반에 빵을 담아온 손님에게 영수증을 건네주고 있었다.
“토오노씨는, 일을 배우는 게 빠르네요.”
오늘 아침부터 후루카와 빵집의 일을 돕고 있던 미나기는, 이미 계산까지 완벽하게 해내고 있었다.
“……보통.”
“토오노씨, 미나기씨라 불러도 될까요?”
갑자기 사나에가 그렇게 묻자, 미나기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미나기가 대답하지 않자 사나에는 변함없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토오노씨라 부를게요.”
“……죄송합니다.”
미나기는 고개를 숙였다.
“……쿠니사키씨도…… 토오노라고 부르고 있고.”
“이름으로 불리는 건, 싫은가요?”
“……싫지는 않지만.”
미나기는 한층 더 고개를 숙였다. 성으로 부르게 했던 건, 과거 모친이 미나기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은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유키토와 여행하고 있는 지금, 그런 건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나기는 여전히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두려웠다.
“크아…… 엄청나게 혼나버렸다.”
그때, 아키오가 머리를 긁적이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즐겁게 노셨나요, 아키오씨.”
사나에가 웃는 얼굴로 남편을 맞이했다.
아키오에 이어 유키토도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즐겁게 노셨나요, 쿠니사키씨.”
“……다시는 안 해.”
투덜거리면서 유키토는 미나기를 바라보았다.
“어이, 토오노. 슬슬 나가자. 즐거운 인형극을 시작해야지.”
“아, 네.”
유키토의 말을 들은 미나기는 사나에에게서 빌렸던 팬더 마크의 앞치마를 벗기 시작했다.
벗은 앞치마를 사나에에게 건네주며, 미나기는 약간 부끄러워하면서 입을 열었다.
“……어제는 못했지만, 오늘은 저도 만담을 할게요. ……비장의 개그를, 생각해 두었습니다.”
미나기의 말에, 유키토의 얼굴이 굳어졌다.
분명히 곤란해 보이는 유키토의 얼굴을, 아키오와 사나에가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아, 아니, 토오노…… 만담은 하지 않아도 돼.”
유키토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렇게 말했다.
“……왜요?”
토오노의 물음에 유키토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는 그냥 넘어가 왔지만, 이번 기회에는 제대로 말해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유키토는 말했다.
“아니, 그게…… 실은 토오노의 만담은 별로…… 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말야, 손님을 끌어 모으는 데는 그다지……”
유키토의 표정을 보며, 미나기는 유키토의 진의를 깨달았다.
“……저의 만담은,”
미나기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쿠니사키 극단의 짐이었던 거군요오오오!”
그렇게 외치며, 미나기는 가게를 뛰쳐나갔다. 당황한 유키토가, 옆에 놓여있던 빵을 입에 물며 외쳤다.
“나는 매우 좋아한다아아아아앗!”
미나기를 쫓아 달려가는 유키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키오는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녀석, 아무 생각 없이 빵을 입에 물고 가버렸군…….”
“분명, 제 빵이 마음에 들었던 걸 거예요. 저 빵, 내일부터는 더 많이 만들까요?”
“사나에, 사랑한다.”
“고마워요.”
◇◇◇
결국 유키토는 미나기를 붙잡는데 성공, 겨우 달래는 데 성공했다. 미나기가 너무 멀리까지 달려갔기 때문에, 후루카와 빵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결국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인형극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다른 도구는 후루카와 부부의 집에 두고 왔지만, 인형은 갖고 왔기 때문에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인형을 바닥에 내려놓고, 유키토는 정신을 집중했다. 바닥에 누워있던 인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모의 손을 잡고 옆을 지나가던 어린아이가, 그 모습을 보고 흥미를 가진 듯 이쪽으로 걸어왔다.
유키토는 아이가 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것을 확인한 뒤, 저연령을 대상으로 한 스토리로 인형극을 하기로 결정했다. 미나기가 생각해낸, ‘아기 곰의 벌꿀 찾기’라는 스토리였다.
아까는 그렇게 말했지만, 실은 같이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미나기가 생각해주고 있는 인형극의 ‘스토리’쪽은 상당히 훌륭해서, 손님을 끌어 모으는 데에 상당히 도움이 되고 있었다.
미나기가 나레이션을 담당하고, 유키토가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아기 곰을 연기한다. 잠에서 깨어난 아기 곰이 벌꿀을 찾아 돌아다니는 이야기에,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부모들도, 아버지 쪽은 피식피식 웃으며, 어머니 쪽은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인형극을 보아주고 있었다.
마침내 아기 곰이 벌꿀을 맛있게 먹고 다시 잠이 들었을 때, 세 명의 관람객들은 모두 웃으면서 박수를 쳐주었다. 유키토와 미나기는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하고, 인형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무척, 재밌는 인형극이네요!”
상당히 젊어 보이는, 작은 키의 어머니가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특히, 실 같은 것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는데 움직이는 게 대단해요! 뭔가 장치가 안에 있는 건가요?”
질문을 받고, 유키토는 고개를 저었다.
“장치나 속임수 같은 건 없어. 이건, 법술로 움직이고 있는 거니까.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 인형이 움직이는 거지.”
보통 이런 어른들에게 법술 얘기를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거나 그냥 웃어넘겨지곤 하지만, 이 사람은 달랐다.
“법술이요? 대단해요!”
정말로 놀라워하는 그녀를, 남편으로 보이는 큰 키의 남자가 쿡쿡 찔렀다.
“나기사, 이제 슬슬……”
“아.”
나기사라 불린 여성은, 지갑을 열어 500엔짜리 동전을 꺼냈다.
“죄송해요, 이번 달 생활비가 빠듯해서 이것 밖에……”
“……나기사?”
“네?”
갑작스럽게 이름을 불린 그녀는, 놀라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인형사를 바라보았다.
약간 무서운 눈의 그 인형사는,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인물이었다.
◇◇◇
나기사가 가족들을 물론 유키토와 미나기까지 함께 데리고 오자, 사나에는 정말로 기뻐하며 다섯 사람을 맞았다. 평소에는 많아봤자 두 사람밖에 없었던 가게에 갑자기 일곱 명이 서있게 되었기 때문에, 가게는 상당히 비좁은 상태가 되었다. 거기다가 그 중 세 사람은 평균 이상으로 건장한 남자들이었기 때문에, 결국 사나에의 판단으로 후루카와 부부만 남고 손님들은 모두 방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유키토와 미나기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기사와 그 남편인 오카자키 토모야와 마주 앉았다. 나기사가 내온 차를 홀짝이며, 유키토는 아까 전부터 자신의 인형을 갖고 놀고 있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우시오라는 이름의 그 여자아이는, 인형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 망가뜨릴 것 같으면, 울든 말든 무조건 뺏는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유키토는 차를 홀짝거렸다.
옆에서, 미나기가 나기사에게서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것은, 환상세계의 이야기였다.
한 명의 외톨이 소녀와, 고철인형의 이야기였다. 괴롭고 외로운, 그 겨울의 환상세계 속에서, 소녀와 고철인형은 따뜻하고 사람들이 많은 곳을 향해 여행을 떠났다.
중간 중간에 나기사의 얘기가 끊기면, 토모야가 이어서 얘기했다.
이야기가 후반에 들어서자, 나기사는 잘 모르는 듯 토모야만이 얘기했다.
마지막에 소녀와 고철인형은, 결국 눈 속에서 쓰러지고 만다.
그때 소녀는, 자신이 원래 환상세계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녀는 환상세계 자체와 동화되어 있어서, 곧 원래 세계로 돌아갈 고철인형과 함께 갈 수는 없었다. 그녀가 이 세계에서 없어지면, 원래 세계의 빛들, 즉 사람들이 불행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소녀는 고철인형이 옆에 있어줘서 지금까지 외롭지 않았다. 소녀를 남겨둔 채, 고철인형은 원래 세계로, 모든 것이 일어나기 이전의 세계로 가게 된다. 소녀의 손을 잡으려하는 고철인형에게, 소녀는 외친다.
……안녕…… ……아빠……
……라고.
나기사도 토모야도, 이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혹은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공유하는, 출처가 불분명한 이야기. 무엇을 의미하지도 알 수 없는, 이상한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끝나자, 미나기가 입을 열었다.
“……이치노세, 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나기사와 토모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치노세 코타로, 이치노세 미즈에 부부와, 그 딸인 이치노세 코토미 박사. 이치노세 부부는 사고로 사망했지만, 훌륭한 과학자였다고 합니다. 현재, 그 연구를 딸인 이치노세 코토미 박사가 대를 이어서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치노세 코토미……”
토모야가 어디선가 들은 이름인 것 같은데…… 하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미나기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이치노세 부부가 연구하고 있던 건, ‘다른 세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세계?”
“네. 관측할 수 있는 세계 외에도 우주는 존재한다는 가정 아래, 숨겨진 세계의 존재를 처음으로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 이치노세 부부였다고 합니다. 이 세상이 그 모습을 갖추는 과정에서 떨어져나간 파편, 그것들이 모여 있는 세계를, 이치노세 부부는 증명하기 직전……이었다고 하더군요.”
나기사와 토모야는, 알 듯 모를 듯 하다는 표정으로 미나기를 바라보았다.
유키토는 말없이, 인형을 계속 만지고 있는 우시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분은, 평행세계라는 걸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평행세계?”
“사람마다 정의는 다르고,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미나기는 잠시 말을 끊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가능성, 내지는 선택지가 존재합니다. 물론, 지금 여기 있는 두 분이 걸어온 길은 하나이지만, 도중에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다른 미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쪽 세계가 아닌 다른 곳에, 다른 선택을 했기에 다른 미래가 된, 그런 세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론이 있습니다.”
“하아……”
“지금의 세계와는 다른, 수많은 가능성, 수많은 평행세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 세계를 지각할 수 없는 이상, 이 세계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2차원을 지각할 수 있는 건 3차원, 3차원을 지각할 수 있는 건 4차원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한 단계 위의 차원에 존재하지 않으면, 자신과 같은 차원의, 즉 옆에 있는 평행세계를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점점 어려운 얘기가 계속되자, 나기사와 토모야는 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보며, 미나기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두 분이 친해지지 않는 세계도 있을 수 있고, 두 분이 결혼하지 않는 세계도 있을 수 있지만, 두 분이 그 세계를 직접 볼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이치노세 부부의 이론의 ‘숨겨진 세계’에서라면, 다른 세계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세계를 볼 수도, 혹은 다른 세계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겠죠.”
미나기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저는, 두 분의 이야기 속의 환상세계는, 그런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축의 변화나, 여러 가지로 변화되는 가능성에 대한 언급이, 그렇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군요.”
나기사는 이해하기 어려운 듯 이마에 손을 대고 있었지만, 토모야는 무언가 감이 잡히는 게 있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미나기는 미소를 지으며, 나기사와 토모야에게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두 분의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네?”
“두 분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미나기의 부탁에, 나기사와 토모야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
저녁식사를 마치고도,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길고 긴, 감동적인 이야기에, 중간에 미나기는 몇 번이고 눈물을 흘렸고, 유키토도 슬쩍 뒤돌아 앉아 휴지로 코를 풀곤 했다.
대단원이라고 할 수 있는, 나기사가 우시오를 무사히 낳는 장면에서는, 결국 미나기는 눈물을 흘리면서, 동시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없이 나기사의 손을 꼭 잡았다.
고난을 함께 극복해온 두 사람의 기적 같은 해피엔딩에, 유키토도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기사와 토모야는, 그 날 하늘에서 빛이 눈송이처럼 내려왔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지만, 두 사람한테는 보였다고 했다. 마치 마을이 일으킨 기적이, 나기사의 생명을 구원한 것처럼.
“그래도 전,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기사는 우시오를 끌어안으며, 그렇게 말했다.
“이 마을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요. 마을 또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람들도 마을을 사랑하고 있어요.”
나기사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따뜻한 감정이 가득 찬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누구에게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 속에서 일어난 거니까, 기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당연한,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모두, 가족이니까.”
토모야가 덧붙였다.
나기사와 토모야의 모습을 바라보며, 유키토는 몇 달 전 북쪽의 마을에서 만난 소년을 떠올렸다.
눈이 그치기 시작한 마을의, 한 언덕에 그 소년은 서있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작은 소녀를, 양팔로 안아 들은 채.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니, 소년은 결혼식이라고 대답했다. 작은 소녀는, 그 품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소년은 유키토에게 말했다.
“이 녀석은, 봄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결혼식에 맞춰서 봄이 와서 다행이라고, 소년은 말했다.
하지만 유키토가 소녀를 바라보며 슬픈 눈을 하는 것을 깨닫고, 소년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기적을, 원하지는 않나.”
유키토의 말에 소년은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저는 수없이 많은 기적을 경험했어요.”
소년은 말했다.
“이 녀석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기적 아닐까요? 지금 이 녀석이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것부터가 기적이고, 마침 제가 이 마을에 돌아와 있었기 때문에 재회할 수 있었던 것도 기적이니까요.”
소년은 계속 웃고 있었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저는 수많은 기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어요. 나유키와 아키코씨하고도 재회할 수 있었고, 본래 만날 수 없었던 아유와도 만날 수 있었어요. 시오리는 자살을 포기했었고, 마이는 사유리씨와 만나있었어요. 그 외에도 수많은 기적들이, 제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눈을 감고, 품속의 소녀에게 볼을 비볐다.
“어째서 이 세상에는, 이렇게나 많은 기적들이 있는 걸까요. 지금 이 녀석과 이 자리에 서기까지도, 수많은 기적들이 있었어요. 생각해보면, 일상이란 수많은 기적들이 모여서 만들어져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적어도, 저는 이 기적들을 깨닫기 위해 이 마을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움직이지 않는 작은 신부를 안고, 소년은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눈물을 흘리지도 않고,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아마노하고도 약속했고 말이죠.”
소년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고, 소녀에게 웃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있었다.
그 소년의 모습이, 눈앞의 부부의 모습에 겹쳐 보였다.
‘당연한, 자연스러운 기적인가…….’
유키토는, 묘한 기분으로 나기사의 품속에서 잠들기 시작한 우시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키토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아마 토모야도 어느 정도는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환상세계의 이야기 속의 소녀는, 지금 잠들고 있는 우시오, 저 아이다.
아마 우시오를 낳은 뒤 나기사가 죽고, 후에 우시오 또한 죽는 ‘세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때의 우시오가, 그 환상세계 속의 ‘소녀’이다.
아키오와 나기사의 이야기를 종합해볼 때, 나기사는 어렸을 적에 자연, 혹은 마을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에 링크된 것이라 여겨졌다. 아마 그 곳은, 그 ‘환상세계’와 연결된 장소였을 것이다.
아키오는 죽어가는 나기사를, 현재 병원이 되어있는 공터에 데려갔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병원이 세워지면서 나기사는 점점 쇠약해졌다고 했다.
나기사는 어렸을 때 환상세계에서 생명을 받았던 게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환상세계의 기억을 가질 수 있었겠지…….’
유키토는 마음속에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환상세계와의 링크에 의지하고 있던 나기사의 생명은, 병원이 세워지면서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연이 파괴되고 인공물로 채워지면서, 환상세계와의 통로가 닫혀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 나기사가 죽고, 환상세계에서의 생명은 살아남은 우시오에게 연결되었지만…… 결국 우시오도 나기사와 비슷하게 고통을 겪고, 죽었던 거겠지. 하지만 환상세계에서 토모야와 만나, 토모야를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의 시간으로 돌려보내 빛을 모으게 했다…….’
그리고 각각의 세계의 토모야가 찾아낸 빛은 환상세계에 모여, 지금 세계의 나기사를 구했다.
유키토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어째서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술술 나오는지, 유키토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최근 들어, 자신이 지금의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연결되어있는 듯한 기분이 자꾸 들었다. 어쩌면 자신도 토모야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다른 세계의 자신과 연결되어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유키토는 생각했다.
머리가 아파졌기 때문에, 유키토는 복잡한 생각은 그만뒀다.
‘하지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기적이라고 해도 말야…….’
유키토는, 마음속에서 중얼거렸다.
’너희들은, 정말로 열심히 했어. 지금 세계의 너희들도, 다른 세계의 너희들도……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기적이 있는 거니까.’
유키토는 속으로, 나기사와 토모야에게 수고했다고 말했다. 누구의 일이든, 어디의 일이든 노력한 사람이 보답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유키토는, 가슴이 아리는 것을 느꼈다.
‘그럼, 그 환상세계의 소녀는 어떻게 된 걸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겨울의 세계에 홀로 남겨진 외톨이 소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혼자 추운 눈 속에 남기로 한 소녀가, 유키토는 안쓰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 소녀의 행복은? 그 소녀의 미래는?
그 소녀만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쓸쓸한 웃음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인가.
유키토는, 자신과 미나기가 공유하는 추억 속에 존재하는, 한 명의 소녀를 떠올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미나기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쓸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
오카자키 부부와의 얘기를 끝낸 뒤, 아키오의 주도로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제대로 술을 마실 수 있는 건 남자들뿐이었지만, 평소에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여자들도 이번에는 한두 잔 정도는 술을 입에 댔다. ……술주정이, 대단했지만.
술잔이 몇 번 돈 뒤 아키오의 주도로 에로토크가 시작되어, 미성년자에게는 들려주기 어려운 얘기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본래라면 사나에와 나기사가 말렸겠지만, 둘 다 취해있었기 때문에 이야기는 계속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참고로 가장 곤란해 했던 건, 토모야였다.
결국 유키토가 사나에와 나기사에게 동시에 추파를 보내는 것을 보고 격노한 아키오가 술병을 휘두르다가 미끄러져서 기절, 그대로 잠이 들어버리는 것으로, 광란의 연회는 겨우 막을 내렸다.
토모야는 해롱대는 나기사를 부축하며 미리 우시오를 재워놓은 나기사의 방으로 이동했고, 유키토와 미나기도 어제 묵었던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유키토는 조금 휘청거리는 미나기를 이불에 눕혔다. 취한 미나기는 약간 얼굴이 상기되어 있고 가끔 미소를 지어서, 무언가 요염한 부분이 있었다.
유키토는 불을 끄고 따로 깔려있던 이불 속에 누웠다.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유키토에게, 미나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쿠니사키…… 씨?”
“뭔데, 토오노.”
유키토가 대답하자, 잠시 후 미나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우시오, 귀여웠지요?”
“음…… 그랬지 뭐. 보통 어린애는 조금 짜증나는 경우가 많지만, 우시오는 말썽도 안 부리고 얌전해서 마음에 들었어.”
“……우리 아기도, 그렇게 귀여울까요?”
“풋!”
아마 무언가를 먹거나 마시고 있는 도중이었다면, 대참사가 일어났을 것이다. 유키토는 이불 속에서 벌떡 일어나 미나기 쪽을 바라보았다.
“토, 토오노? 서, 설마?”
“……아, 그런 얘기는 아니고.”
어둠 속에서, 미나기가 작게 웃는 것이 보인 듯 했다.
“……그냥, 생각해봤을 뿐…….”
“……깜짝 놀랐잖아…….”
유키토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뭐, 토오노를 닮았다면 귀엽…… 지 않을까?”
애매하게 대답하는 유키토.
“……아까 이름…… 을 생각해봤는데요.”
술자리에서 계속 조용하더니,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유키토는, 술을 마시며 미나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궁금해졌다.
“……여자아이라면, 미치루.”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던 대답이었다.
“……그리고, 남자아이라면……”
미나기는, 잠시 말을 끊었다.
“남자아이라면, 어떻게 할 건데?”
유키토의 물음에, 미나기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키토.”
“앙?”
“……유키토, 라고 할 거예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쿠니사키씨.”
유키토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다시 미나기가 말했다.
“……그쪽으로, 가도 될까요……?”
미나기가 일어나, 어둠 속에서 천천히 유키토에게 다가갔다.
미나기는 유키토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 유키토의 곁에 누웠다.
그리고 유키토의 팔을 껴안았다.
“……저는, 무서워요.”
미나기는 유키토에게 속삭였다.
“……쿠니사키씨가, 언젠가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저는 언제나 무서워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모른 채, 유키토는 미나기의 목소리를 들었다.
“언젠가 제가 모르는 곳에서, 모든 힘을 다 쓰고 없어져 버릴 것 같아서, 그게 무서워서……!”
미나기는 작은 목소리로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함께 여행을 하면서 눈물을 흘린 적은 있었지만, 우는 목소리를 낸 건 처음이었다. 아마, 3년 전 그 비가 내렸던 옥상 이후의 일.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절 내버려두고 사라질 것 같아서, 외톨이로 남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래서……”
이불 속에서 유키토가 몸을 움직이자, 미나기는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옆으로 누운 유키토가 미나기의 어깨를 안아주자, 얌전히 몸을 맡겼다.
“토오노.”
“……네.”
“이 마을에, 남지 않을래.”
유키토의 말에, 미나기는 곧바로 대답했다.
“싫어요.”
“……그런가.”
“저는 분명히, 데려가 달라고 말했어요. 용기도 의지도 없는 제가, 겨우겨우 말해서 선택했던 거니까…… 쿠니사키씨가 말하라고 했으니까, 제 입으로 말하면 데려가준다고 했으니까……”
미나기는 유키토의 품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계속 책임져주세요.”
유키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나기는 유키토의 품속에서, 조용히 울었다.
# by | 2004/07/29 16:54 | (과거로그)創作 | 트랙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