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시미 츠카사의 두 번째 라이트노벨인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는 기획 과정에 편집자가 깊이 관여해 전략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주인공 쿄스케가 ‘아직 중학생인 여동생이 여동생을 공략대상으로 삼는 18금미소녀게임을 선호하는 오타쿠였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상코미디로, 편집자가 작가의 장점이라 파악한 ‘등장인물들 사이의 경쾌한 대화’를 살리기 위해 기획된 소설이죠.
그 인상적인 설정 탓에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정식발매되기 이전부터 화제가 되었습니다만, 사실 작중에 ‘여동생이 여동생의 야한 장면이 나오는 게임을 한다’라는 설정에서 기대할 만한 내용은 거의 담겨있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남들에게 자신의 취미를 숨기고 있던 여동생 키리노가 오타쿠로서 겪게 되는 다양한 트러블에 중점을 두고 있었죠.
일종의 가족코미디로서 경쾌하게 진행되는 작풍 때문에 많은 독자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만, 일부 독자들 사이에서는 한 가지 마음에 걸린다고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1권의 후반부에서 키리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취미를 들키게 됩니다. 오타쿠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아버지는 키리노의 그런 취미를 그만두게 만들고 소장품들도 뺏으려 하죠. 이때 오빠인 주인공이 나서서 아버지를 설득하게 됩니다만, 독자들이 어색함을 느꼈던 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오타쿠가 아닌 주인공의 입을 빌려, 오타쿠를 긍정하는 말을 하게 했기 때문이죠.
일본에서의 오타쿠 긍정사실 일본에서의 오타쿠의 사회적 지위는 한국에서보다 낮습니다. 물론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덕후’라는 식으로 희화화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리 큰 차이는 없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뿌리가 깊으면서 폭이 넓은 일본에서의 부정적 이미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원래 일본에서 ‘오타쿠’라는 단어가 사회적으로 정착한 건 로리타 취향의 오타쿠가 범인이었던 1988~1989년의 도쿄・사이타마 연속소녀유괴살인사건(이른바 미야자키 츠토무 사건) 때문입니다. 일본사회에서 오타쿠란 처음부터 부정적인 이미지와 함께 알려졌던 개념인 것이죠.
그 시절처럼 변태적 범죄자 취급받는 경우는 줄어들었습니다만, 오타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거의 일본사회의 공통된 인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에 등장하는 쿄스케와 키리노의 아버지도 그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탕으로 오타쿠를 보고 있는 전형적인 일본인 중 한명이라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차별이 있으면 당연히 그에 대한 반발도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자신들이 과도하게 부당한 취급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오타쿠들을 ‘긍정’해주기 위해 활동했던 것이 바로 가이낙스 사장 출신의 오카타 토시오였습니다.
오카타 토시오는 오타쿠에 대한 네거티브한 이미지가 만연하던 90년대 중반에 오타쿠의 대변자, 옹호자로서 등장한 인물입니다. 저서인 『오타쿠학 입문』의 「하지만 나는 사실 오타쿠는 차별받을 인종은커녕 ‘영상의 세기’라 불리는 이 20세기에 태어난 뉴타입 인종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서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타쿠를 예리한 식견을 지닌 전문가라 규정하고 정보화사회를 이끌어갈 리더라는 주장을 폈었죠.
오타카 토시오는 이전까지 매스컴에 등장하던 오타쿠들과는 달리 말솜씨가 있었는데다가 실제로 오타쿠를 이용해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다는 ‘실적’이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 주장은 상당히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일본대중문화개방이 시작되던 90년대 말의 한국에서는 이런 오카타 토시오식의 오타쿠 해석이 중점적으로 소개되었기 때문에 한때 오타쿠를 대단한 것으로 취급하는 풍조가 생기기도 했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식의 오타쿠 긍정은 사실상 소멸하게 됩니다. 엘리트 의식이 강했던 70~80년대의 오타쿠에서 보다 라이트하고 대중화된 90~2000년대의 오타쿠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오타쿠들 사이에게도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 되고 말았죠.
오카타의 『오타쿠학 입문』이 간행된 게 1996년. 이 시기에 『에바』붐에 편승하는 형태로 오카타 등 제1세대가 갑자기 오타쿠 작품이 아니라 오타쿠 자신에 대해 말하기 시작해 오타쿠라는 말이 포지티브한 의미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차례차례 간행되는 오타쿠 제1세대에 의한 「오타쿠 계몽서」에, 『에바』의 기원을 찾기 위해 과거의 오타쿠 작품을 뒤지고 있던 당시 중학생이던 필자의 세대는 기쁘게 달려들었다. 필자도 그 중 한 명...이라고 하면 멋있겠지만 실제로는 스쿨 카스트 최하층에서 매일 우울하게 지내던 시기에 「오타쿠는 실은 문화 엘리트다! 그러니까, 너를 바보 취급하는 학교애들이야말로 바보인 것이다!」(의역)이라는 오카타의 말이 복음처럼 들렸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렇게 오카타에게 멋지게 세뇌당한 필자는 『오타쿠학 입문』에서 우리들의 적이라고 배운 서브컬처(라는 것이 뭔지는 전혀 모르겠었지만, 아마 학교에서 여자한테 인기 있는 짜증나는 남자놈들이 듣고 있는 B'z하고 쟈니즈하고 SMAP 같은게 분명하다, 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를 타도하고, 오타쿠 유토피아를 건국하기 위해 훌륭한 오타쿠가 되는 것이다, 라고 결심했고─결국 좌절했다.
-『유리이카(ユリイカ) 2005년 8월 임시증간호 오타쿠VS서브컬!(オタクVSサブカル!)』
前島賢「僕をオタクにしてくれなかった岡田斗司夫へ 断絶と反復と」
그 후로도 다양한 방면에서 오타쿠 긍정을 위한 시도가 있었습니다만, 오타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것은 물론 오타쿠들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되는 것조차 계속해서 실패해왔습니다. ‘오타쿠도 나쁘지 않다’라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이면서 설득력 있는 논리는, 일반인들은 물론 오타쿠 본인들조차 접하지 못했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오타쿠 긍정’은 결국 개개인의 영역의 문제가 되고, 오타쿠들 자신이 즐기는 픽션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되는 시대가 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오타쿠 자체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에 대한 기피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죠.
오타쿠의 자의식을 최대한으로 자극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후, 상실체험으로 인해 현실세계에서의 존재기반을 잃어버린 주인공이 결락을 지닌 히로인들과의 관계를 통해 서로의 존재의의를 회복하는 『ONE ~빛나는 계절로~』등 다양한 ‘긍정’의 이야기가 생산되고 오타쿠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정작 오타쿠 자체를 직접적으로 소재로 삼은 작품에서 내놓은 테마는 이런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개개의 드라마를 지지하는 사람은 있어도, 전반적인 공감을 준 경우는 없었죠.
『신세기 에반게리온』이후 오타쿠 문화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오타쿠의 자의식이나 욕구에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어왔다는 걸 생각하면, 정작 오타쿠 자체에 대하여 해답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중심에 위치하지 못했다는 건 상당히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오타쿠에 대해서 직접 얘기하지 않고 항상 다른 방향성에서만 접근하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오타쿠 자신이 ‘오타쿠 긍정’의 이야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대중소설가인 이시다 이라의 소설『아키하바라DEEP』은 벤처회사를 만든 오타쿠들이 자신들을 이용하려는 IT기업을 상대로 싸우는 이야기입니다만, 오타쿠에 해당되는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시다 이라는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오타쿠들을 재능 있고 멋진 녀석들로 묘사하고 있는데, 정작 진짜 오타쿠들이 그런 묘사를 접하면 낯간지럽기만 한 것이죠.
상당구의 오타쿠는 ‘오타쿠 긍정’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접할 때 이런 식으로 반응합니다. 『현시연』처럼 오타쿠에 대한 가치판단을 최소화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타입이라면 모를까,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오타쿠를 긍정하는 이야기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오타쿠 긍정은 오타쿠 부정에 대한 반발과 보상심리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고, 엘리트의식을 지니고 있던 과거 세대의 오타쿠들과는 달리 최근의 오타쿠들은 자화자찬이 어렵습니다. 결국 오타쿠의 비관적인 자의식은 ‘이런저런 미사여구로 긍정해봤자 결국 오타쿠는 오타쿠’라는 인식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를 읽는 오타쿠의 자의식『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의 후반부에 대한 반응에는, 이런 오타쿠의 자의식이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의 키리노는 아직 중학생으로, 오타쿠 취미는 악영향만 준다고 생각해 금지시키려고 하는 아버지에게 논리적으로 항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어린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빠인 쿄스케가 키리노를 대신해서 아버지에게 반론하게 되고, 키리노의 취미는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열중할 수 있는 취미라는 것을 설명하고 악영향만 준다는 생각이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해 결국 아버지를 설득하게 되죠.
「물론 나는, 그녀석들의 취미는 전혀 이해할 수 없어. 이해할 수 없지만! 푹 빠진다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이야?! 그런 건 말야, 중요한 거 아니냐고! 이것봐! 그렇게 간단히 버려도 되는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허락해주라는 거냐? 나쁜 영향밖에 주지 않는, 쓸데없는 취미를?」
아버지가 일어나서 나를 봤다. 키리노의 100배는 무서운 눈빛이 심장을 꿰뚫었다.
오줌을 지릴 것 같다. 지금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빌고 싶어.
「나쁜 영향밖에 없는, 쓸데없는 취미라고 했지...?」
-후시미 츠카사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
이는 오타쿠가 아닌 쿄스케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는 객관적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주장은 오타쿠인 키리노가 해야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오타쿠인 작가의 말이기도 합니다. 오타쿠의 자기변호를, 일반인의 입을 빌리는 것으로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는 것이죠.
이 부분을 의식하게 되는 독자, 즉 오타쿠로서의 자의식이 강한 독자는 여기서 위화감을 느끼게 됩니다. 대놓고 자화자찬하지는 않았지만 일반인의 입을 빌려 오타쿠를 긍정하려고 했다는 점을 거북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2권에서는 오타쿠에 관련된 일종의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서도 쿄스케의 입을 빌려 ‘작가의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타쿠에 대한 편견 내지는 차별의식을 지닌 상대방에 대한 반론을, 일반인인 쿄스케를 통해 중립적이고 공정한 견해인 것처럼 제시하고 있는 것이죠.
더군다나 18금 문제나 생리적인 거부감 등 논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은 쿄스케가 ‘자폭’해서 얼버무리면서 해결해주고 있기 때문에,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호의적으로 받아넘기기가 어렵게 됩니다.
반대로 오타쿠로서의 자의식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독자는 이런 감상을 갖지 않습니다. 조금 작위적이긴 하더라도 작가의 말이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은 소설에서 흔히 있는 일이고, 그냥 오빠가 여동생을 멋지게 감싼 장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요. 혹은 오타쿠를 대변해주는 쿄스케의 주장에 순수하게 감동하고 대리만족을 느낄 수도 있겠죠.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의 후반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독자가 있고 제기하지 않는 독자가 있는 건 이런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독자가 갖고 있는 오타쿠로서의 자의식이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느냐에 따라, 그 반응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물론 그런 의견차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설득력이 있는 서술을 보여줬다면 얘기가 달랐겠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그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건 오빠가 여동생을 챙겨주는 내용인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가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하는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키리노가 성장해, 오빠가 아닌 자신의 말로 상대방을 설득하고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때는 의미가 변할 수도 있겠죠. 그렇게 된다면,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속의 오타쿠 긍정은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